튀밥장이 30년 ‘뻥이요’와 희노애락
김덕천(보은풍취 진설미)씨의 사는 이야기
2004-09-25 송진선
그러나 지금은 가정에서 만들기 보다 제품으로 나왔는 한과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옥수수 튀밥은 먹을 것이 흔하지 않았던 6, 70년대는 물론 80년대에도 귀한 간식이었다.
옥수수 껍질이 터지면서 하얗게 부풀어 오른 튀밥을 입에 넣고 먹다보면 옥수수 껍질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혀를 움직이며 떼던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지금은 옥수수의 껍질을 벗겨내고 튀기기도 해서 그런 걱정은 없지만 고소함은 껍질을 벗기지 않고 튀기는 맛이 훨씬 더하다.
이렇게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는 옥수수 튀밥, 쌀 튀밥, 떡튀밥 튀기기를 생업으로 하며 30년의 세월을 보낸 김덕천(63, 보은 풍취 진설미)씨.
보은 장날마다 보은읍 삼산리 순대골목 옆 공터 5, 6평에 튀밥기계를 놓고 튀밥을 튀기고 있다.
간식거리가 흔해 튀밥 일감은 급격히 줄었지만 그는 장날이면 으레 그 자리를 지키며 명물 튀밥을 생산하고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과 함께 외롭게 자란 김덕천씨는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워 학교 공부는 일찌감치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낮에 일하고 야학을 했다.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남의 농사도 짓고 닥치는 대로 일하다 32살 때 먹고 살기 힘들고 배운 기술도 없어서 튀밥 장수 보조로 들어간 것이 그의 튀밥 인생이 시작이다.
작은 깡통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워 기계 아래에 놓고 사람이 일일이 돌리며 튀밥 솥을 데우면 솥안의 압력이 증가한다. 어느 정도 돌려 익었다 싶은 어림짐작으로 기계를 세워 솥 안의 압력을 빼 튀밥을 꺼내는 작업을 한다.
시간대중을 잘해야지 좀 늦게 열면 튀밥이 타고 또 조금 일찍 열면 완전히 튀겨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처음 이런 타이밍을 잘못 맞춰 물어주기도 여러번. 하얀 꽃송이처럼 피어오른 옥수수 튀밥, 쌀 알 크기가 부풀어 오른 쌀 튀밥을 온전히 내 기술로 만드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지금은 장작대신 석유가 대신하고 모터가 알아서 기계를 돌려줘 시간만 잘 재 압력을 빼 튀밥만 꺼내면 돼 몸이 편하게 되었다.
아침 8시에 시작해 밤 1시까지 보은장날을 비롯해 관기장, 원남장, 청산장도 다니고 평일에는 경북 용화까지 동네를 누볐고 하루만에 끝내지 못하면 동네 주민들이 방을 내줘 동네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까지 튀기기도 했다.
튀밥을 잘 튀겨 한 방에 5원 했을 때 기계를 4대까지 돌려 하루 70∼80방을 튀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한 방에 2000원하는 지금은 기계도 2대로 줄었고 물량도 하루 50방 정도 튀길 정도로 줄었고 그것도 튀밥보다는 옥수수 및 둥글레, 치커리, 두충나무 등 차 거리 물량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시대변화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옥수수 튀밥 기계는 22년. 튀밥 튀길 때 넣는 사카린 통도 20년이 넘었고 튀밥을 꺼내는 타이어로 만든 그릇도 20년이 넘었다.
자녀들에겐 절대로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아끼며 생활해 슬하의 2남1녀는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장한 아버지이지만 자신을 만나 고생만 하고 호강 한 번 시키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부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평생 고생만 한 것을 안 자녀들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는 보은 장날이면 삼산리 순대골목옆 그의 둥지에서 튀밥 기계를 돌린다.
그리고 뻥이요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 22년의 세월을 먹은 튀밥기계는 여전히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