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보다 깊은 숲
2004-07-10 보은신문
이것은 매표소 앞에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유럽인 한 명과 매표소 직원간에 오간 대화입니다. 너무도 젊어 보이는 분이 환갑이 지났다며 신분증도 제시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들어가겠다고 옥신각신 하는 일은 자주 보았지만 굳이 돈을 내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분은 보지 못했던 터라 이 외국인의 행위는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제대로 된 염치와 자존심을 보는 것 같아서 유쾌해졌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수없이 많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입히며 살게 됩니다. 상처를 주기만 하며 사는 사람도 없고, 반대로 상처를 받기만 하며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나이는 단지 그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셈이 아니라 그가 받은 상처의 세월인지도 모릅니다.
그 중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누구 보다 포근한 위로를 건네야 할 사람에게 받는 상처입니다.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숲은 생각 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필자는 국립공원 속리산에서 자연해설을 합니다. 불특정 다수의 탐방객을 상대로 하다보면 자연의 혜택을 그 중 많이 받는 분이, 다시 말해 자연을 가장 많이 아껴야 할 분들이 사실은 자연을 가장 많이 훼손하고 상처 주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숲 깊숙한 곳에 자신이 가져온 쓰레기를 숨겨놓고 가는 사람들도 누구 보다 산을 좋아하는 산사람들입니다.
웬만큼 산을 좋아해서는 오르기 힘 든 코스나 정상부근에서 발견되는 쓰레기들은 모두 산을 좋아하는, 소위 산꾼이라 자청하는 사람들에게 입은 자연의 상처입니다.
아직도 가족단위로 자연을 찾고 그곳에서 고기를 구어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동물성 기름 덩어리들은 땅으로 스며들어 식물들을 아프게 하고 하천으로 흘러들어 우리가 마시는 식수를 오염시킵니다.
스스로 맑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계곡 물에 화학세제를 풀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내 가족, 내 물건만 깨끗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행됩니다.
그 자녀들이 학교로 돌아가 환경에 대한 공부를 할 때 부모와 함께 했던 자신들의 행위를 떠올리고는 가슴 한 구석이 개운치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잘못된 자식사랑은 자연과 자녀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자연이 좋아서 자연을 찾은 그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 쯤에는 어떤 식물이 자라고, 몇 월경에는 어떤 식물이 꽃을 피우고, 그들이 숲에 또는 자연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계시는 분들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 만큼은 진정으로 자연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그대로 행동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일수록 욕심이 과해서 더 많은 것을 자연으로부터 빼앗아 내 것으로 취하고 싶다는 열망이 크기 마련입니다. 이 열망의 크기에 따라 자연에게 가해지는 상처의 크기가 판가름 납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경우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늘 상처뿐인 영광의 얼굴로 냉가슴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람뿐 아니라 주변 환경에도 많은 상처를 남기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고기를 구어 먹고, 물을 더럽히며 신나게 노는 일 말고도 유익한 놀이가 많이 생겼습니다. 전국 어느 국립공원에서나 부담 없이 자연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진정으로 느끼고 깊이 있게 품을 수 있는 자연체험학습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예약제도 잘 운영되고 있어 약간의 품만 판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소중하고도 가슴 뿌듯한 선물을 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아닌 사랑을 건네는 행위가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염치, 자존심을 가르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받고 싶지 않은 상처, 자연에게도 주지 맙시다. 특별히 인간에 의해 정돈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숲은 우리 보다 깊습니다.
/백 연(속리산 국립공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