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한 발산 김인자씨
한달 60만원 벌이로도 남 퍼주기에 바빠
2004-05-15 송진선
개 몇 마리가 컹컹 짖고 개가 밥 끓이는 솥이 좁은 마당에 걸려있고 라면박스 등 폐품을 수거한 더미가 마당 한켠에 놓여있었다.
보은 자활후견기관 관장인 성낙현 목사님으로부터 60만원 벌어 20만원을 북한 룡천참사 어린이 돕기 성금으로 내놓을 정도로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며 꼭 소개를 해보라는 제보(?)를 받고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성낙현 목사님을 팔아가며 어렵사리 찾아간 집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갈데가 없어서 성당 밑 쪽방에서 생활했을 정도로 너무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콩 한 쪽도 나누면 배고픈 다른 사람이 허기를 면하는 한끼의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
경기도 안성이 친정인 김인자씨가 보은으로 이사와 20년동안 살며 제2의 고향이 된 사연은 책 몇권을 써도 다 담지 못할 정도의 드라마였다.
슬하의 3녀 1남을 데리고 지금 24살인 막내아들이 4살 때 혼자 몸으로 보은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째 딸은 장애 3급의 지체부자유인 상태이고 셋째 딸은 심한 당뇨를 앓고 있어 자신의 가족을 챙기기도 벅찬 김인자씨는 다방여종업원 등 사회적으로 하류인생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의형제를 맺어 그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추워 떠는 사람보면 끼고 있던 장갑이라도 끼워주고 데리고 와서 밥을 먹여 보낼 정도는 약과다. 예날 동냥을 다니던 거지에게 아이들과 한 상에서 밥을 차려줄 정도였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주저리 주저리 엮어놓았다가 풀어놓은 그의 인생역정은 너무너무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생활자체가 봉사였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김인자씨 집을 들락거리던 피붙이 아닌 식솔이 20명이 넘었다.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은 꼭 김인자씨에게 쓰기 위해 생긴 말인 듯 싶었다.
산채를 뜯어 팔고 다방에서 주방 일도 봤고 닥치는대로 일해 생활비를 벌었지만 쥐구멍에 볕뜰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나마 IMF로 공공근로가 생기면서 국유림 숲가꾸기 사업, 1주일에 3일 정도 나가는 읍사무소 취로사업으로 벌이를 했고 이마저도 없는 겨울에는 호떡장사를 해서 근근덕신 입에 풀칠할 형편밖에 안될 때였다.
그러다 장애를 앓고 있는 첫째 딸이 밀알선교단의 장애인 자립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인연이 돼 자활자립단원이 돼 지금 같이 생활하는 이종사촌 동생인 김선보(55)씨와 함께 도배도 하고 장판을 까는 등 집고쳐주는 일을 하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퇴근 후에는 어느 때에는 밤 2시가 되도록 오토바이를 타고 군내 곳곳을 돌며 이종 동생과 박스, 빈병, 고철 등을 수거해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했고 날씨가 좋지 않아 일을 쉬는 날에는 남의 집 농사를 거들며 일당벌이도 했다.
그렇게 해도 한달 100만원 벌기도 어려운데 그 돈으로 아이들 가르치고, 생활하고 거기다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초청해 잔치도 열어주고 소년소녀 가장들에게는 명절 때 김치도 담아주고 떡도 나눠주고 봉투에 돈을 넣어 고기를 사먹으라고 주머니에 찔러주기도 했다.
또 옥천군 동이면에 있는 비인가 복지 시설에서 장애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씻겨주고, 놀아주고, 청소, 빨래 등 몸으로 봉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보은에서 오갈데 없는 불우노인 3명이 이 시설에 입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때도 역시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도저히 방이라고 할 수 없는 쪽 방에서 자녀 넷과 자신, 이종동생까지 함께 생활했을 때다.
한푼이라도 저축을 해서 집을 사겠다,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겠다는 등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보통인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관이다.
그런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지난해 1월19일 저녁시간에 이종동생과 온천욕이라도 하자며 간 대전유성 길바닥에서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그녀가 무의식 중에서도 거부한 탓인지 김인자씨의 멈출줄 알았던 심장은 다시 뛰었다.
김인자씨는 부모에게서 얻은 목숨은 이미 지난해 1월19일 죽었고 1월20일부터는 하느님에게서 목숨을 덤으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김인자씨에게 쪽방신세를 면할 기회가 왔다. 집고쳐주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 집을 소개해 2002년 8월 허름한(?) 집을 살 수 있었던 것.
그동안 집고쳐주는 일을 하면서 배운 솜씨로 도배, 장판, 문도 다시 달았고 성악현 목사의 입주 선물로 새 싱크대를 놓은 번듯한 김인자의 집이 생겼다.
여전히 생활은 넉넉지 않았지만 집도 절도 없었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두다리 뻗고 편히 누울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동안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가 하는 생각을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성당을 다닌 탓인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잘 견디라는 신의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열심히 이를 악물게 되었다고 한다.
갓 시집간 동네 이웃집에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보고 사치부리는데 쓸 돈으로 그들을 거둬먹여야 했기 때문에 치장하는 것을 포기하게 돼 지금은 꼭 첫인상이 남상인 여자가 되었다며 웃으면서 얘기하는 김인자씨를 보면서 가난하지만 부러운 여유가 느껴졌다.
로또 복권에 매달리고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며 아등바등 사는 것이 보통인 우리 생활과는 너무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