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탐방 난방 역사 간직한 보은솜공장
뭉게 구름같은 목화가 솜으로 태어나는 곳
2003-09-06 송진선
시집가는 딸의 이불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아침 일찍 어머니는 목화를 머리에 이고 솜틀집을 찾아 종일 기다렸다가 겨우 솜을 타서 다시 발길을 재촉해 오면 저녁밥 지을 시간이기도 했다. 내의가 시원찮은 시절 목화 솜으로 누빈 바지저고리 두벌로 겨울을 나던 때도 있었다.
불과 20년도 안된 그 때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다. 지금은 목화솜 이불을 얇은 캐시미론 이불이, 구들장 대신 기름 보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자연히 솜틀집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전락하고 솜틀은 박물관에 전시할 골동품이 되었다. 아마 전국적으로 단 한 곳일 수도 있을 귀한 그 솜공장이 보은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보은읍 죽전리 122-3번지 항건천 제방아래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보은 솜공장 대표 허만경(76)씨는 이미 여러 번 주인이 거쳐간 100년 가까운 솜틀이 버티고 있고 구석구석 솜의 잔해가 가득 묻은 그곳에서 지금도 솜을 타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허만경씨가 솜공장을 한 것은 84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보은 솜공장은 성황을 이루던 때였다. 산촌인 내속리면 만수리에서 산비탈 밭을 일구고 달구지도 없이 짐이란 짐은 모두 지게로 져 나를 정도로 신역(身役)이 고됐던 허만경씨는 급기야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사고를 당했다.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자 74년 700평 가량의 논을 마련해 외속리면 오창1리로 이사를 나왔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한 그의 부인이 고생고생 하며 집안을 꾸려갔다. 당시 처의 당숙이 운영하던 보은대장간을 자주 놀러오던 허만경씨는 솜공장을 내놓았다는 얘기를 들었고 가진 돈도 없이 무조건 인수를 해버렸다. 150만원 보증금에 월세 20만원. 허씨에게 무척 큰돈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허만경씨 수중에 무슨 돈이 있을까. 당시 그는 국민주택 융자금을 받아 집을 지을 당시였고 농협으로부터 받을 융자금이 150만원 가량되었는데 집을 지었던 목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를 솜공장 인수자금으로 쏟아부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솜공장은 호황을 누려 융자금은 곧바로 갚을 수 있었고 군내는 물론 경북 화령에서도 와서 보은 솜공장은 장날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침일찍 와도 저녁이 되어서야 솜을 탈 수 있었고 탈 순서를 기다리는 솜들이 가게 한쪽에 수북히 쌓였을 정도였다. 1㎏에 450원∼500원하다 700원∼800원으로 올랐다. 80년대만 해도 장날 하루 번 돈이 5∼6만원, 평균 한달 30만원 가량됐다. 지금의 70만원 80만원 벌이 정도 되기 때문에 생활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부엌을 개량하고 주택을 신축하면서 난방을 기름으로 대체하던 90년대 초 들어 일거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솜을 타는데 1㎏에 1500원이지만 한 달 2만원 벌기도 어렵다. 솜공장 한 달 전기세와 전화세 3만 5000원도 안된다. 그래도 솜공장이 족적을 감춰버린 지금 보은은 물론 영동, 상주, 청주, 대전, 서울에서도 손님이 찾아와 아직 문을 닫지 못하고 빨간 전구(쵸쿠다마) 하나 켜있는 솜공장 문을 열어 놓았다.
한평생 살면서 재산으로 남은 것은 벌이가 시원찮아 많이 가르치지 못한 2남2녀의 자식들 외에 집 한 채와 솜틀, 목화이불들 뿐이지만 나중에 가게를 하지 못할 경우 솜틀을 고물로 팔지않고 박물관 등에 기증하는 것도 고려할 정도로 애착이 강하다. 목화솜 이불 대신 캐시미론 이불, 수입산 목화 이불이 대신하는 동안 허만경씨는 어둡고 침침한 솜공장 그 옛날의 역사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