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반세기 기념특집 보은의 어제와 오늘⑤

관광객 27년새 3백64% 증가

1995-09-30     보은신문
광복 반세기를 맞아 ‘보은의 50년 변모 현장’을 인구, 교육 등의 부문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연재 중의 조사과정에서 무엇보다 보은의 역사자료 유실 또는 보존 미비로, 상세한 부문별 조사?분석을 할 수 없음이 가장 안타까웠다. 연재 첫머리에 밝힌 그대로, 기록의 보존과 관리는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사료임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이번호의 생활?경제 변천과정을 끝으로 ‘보은의 어제와 오늘’의 연재를 마친다. <편집자주>

■산업
광복 당시의 농가수는 1만여 호였으나 93년말 현재 7천8백27호로 20% 이상 줄었다. 특히 농가인구는 1970년 9만8백여명에서 1980년 6만2천8백여명으로 30.9% 감소하였고, 1990년 3만1천여명으로 50.6% 감소해 1970년에서 1990년까지 농가인구의 감소가 무려 66%인 5만9천7백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인구감소율인 48.5% 보다도 높은 수치로 보은의 2차 및 3차산업으로의 인구 유출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별 인구구성에서 1960년 2차 및 3차산업 종사자는 총인구에 대비해 6.3%인 6천3백90명이었으나, 94년말, 현재 총인구대비 17.6%인 8천7백80명으로 증가했다. 한우의 마리수는 광복 당시 3천3백31마리에서 95년 6월말 현재 1만6천7백87마리로 늘어났고, 돼지의 마리수 역시 7백79마리에서 1만3천8백57마리로 18배 가까이 늘어났다. 축산업에서는 이처럼 가축의 마리수는 늘어났지만 사육가구는 한우 4천4백51가구, 돼지 82가구에 불과해 개별 농가의 사육이 줄어들고 축산의 기업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은의 광업은 광복전후 금은광 2개소, 토상흑연 7개소, 석회석 1개소, 병토 1개소, 비광 1개소등 12개소였으며, 93년말 현재 보은의 광구수는 54개소로 석탄 62.4t과 토상 흑연 2.4t을 생산하고 있다. 석회석은 자원고갈로 인해 1992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농가 소득 촉진과 소득구조 고도화를 위한 농공단지는 88년에 보은농공단지가, 90년에 외속농공단지가 조성되었는데 23개 업체에 4백48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다.

■물가?시장
물가는 백미 한말이 96원이던 광복 당시에 비한다면 1만2천5백원인 현재는 1백30배 이상 오른 셈이다. 계속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광복 당시 여자 고무신의 시세는 83원, 소금 한되는 3원, 대두 한말은 35원을 호가해 물자부족 등 광복직후의 혼란된 사회상을 말해준다.

광복 당시 보은의 시장은 보은 읍내장(개시일 5,10일), 마로의 관기장(개시일 4,9), 삼승의 원남장(개시일 1,6), 회북의 회인장(개시일 4,9) 등 4곳이었고, 그후 내북의 창리시장(개시일 3,8)이 서다 지난 80년 폐지돼 현재 4곳을 유지하고 있고 보은읍 삼산리에는 보은중앙시장과 종합시장이 상설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개시일은 보은장이 1,6일로, 원남장이 3,8일로 변경되었다.

■관광
보은의 대표적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는 속리산은 1966년 6월에 문교부에서 사적 및 명승지로, 1969년 교통부에서 관광지로 지정하였고, 이어서 1970년 3월 국토건설 종합계획 심의위원회에서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지정 공고하였다.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수는 집계(이하 수치는 유료 입장객)가 시작된 1968년 48만1천9백49명에서, 1986년 처음으로 1백7만4천2백11명(내국인 1백4만9천2백71명, 외국인 2만4천9백40명)으로 1백만명을 돌파하였고, 1993년 1백75만9천21명으로 68년에 대비해 3백64% 증가했다.

특히 석가탄신일을 전후한 4, 5월과 단풍이 물드는 10, 11월 년관광객의 55%가 방문하는 것으로 집계되어 ‘법주사’와 ‘속리산 단풍’이 주요관광자원임을 나타낸다. 또 8월 관광객이 7월과 9월에 비해 30% 많아 피서지로서도 알려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 수는 1944년 3만4천3백24명을 정점으로 1990년 9천9백86명으로 처음으로 1만명 이하로 감소한 뒤, 1993년 7천1백53명으로 줄어 속리산으 leodhlghd보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관광수입은 집계가 시작된 1981년 1억8천3백80만원에서 1993년 44억1천9백90만원(내화 43억7천6백70만원, 외화 4천3백20만원)으로 24배 증가했다.

■상수도
상수도는 1977년 관광지인 속리산 지구에 상수도 시설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속리산 사내지구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소규모 발전용저수지를 수원지로 하고, 수도관 4천30m와 수도전 1백45전을 시설하고 1백36호에 하루평균 2백10㎥를 급수했다. 이어서 1979년 보은읍에 상수도 시설을 하는등 93년말 현재 보은, 삼승 등 1읍2개면에 시설되어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1만5천5백83명에 2만7천1백28㎥의 급수관과 수도전으로 하루평균 3천34㎥을 급수했다.

한편 보은에는 오염이 적은 산골계곡수가 많아 간이상수도가 급속도로 보급되어 1백85개 마을, 6천4백25가구의 2만8천7백68명에 급수하고 있다.

■전화
광복 당시 보은에서는 관공서와 일부 업소에만 교환식 전화가 가설되어 있었으나, 대량보급 정책에 의해 1983년 5천6백83대에서 1995년 8월말 현재 1만9천9백28대로 3.5배나 늘었다. 특히 업무용 전화가 1천9백70대에서 3천7백56대로 2배가량 증가에 그친것에 비해 개인전화는 3천9대에서 1만5천7백33대로 5배이상 늘어났다. 한편 전화방식은 1987년에 모두 자동식 전화로 교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