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반세기 기념특집 보은의 어제와 오늘①
인구 반이상 감소, 특히 30대 두드러져
1995-08-19 보은신문
◆행정구역
보은의 행정구역 변동현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95년-보은군이라 칭함.
1914년-최인군 편입과 대덕군 오동령리 일부 편입으로 10면 체제 갖춤.
1947년-속리면을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분면하여 11면 체제.
1973년-보은면을 보은읍으로 승격하여 1읍 10면의 현 체제 갖춤.
1983년-회북면 율산리를 수한면으로, 회북면 세촌리를 내북면으로 편입.
1987년-내북면 중초리·산성리·노티리·용암리·봉평리·장속리를 보은읍으로, 회남면 노성리를 수한면으로 편입. 보은읍 누저리를 누청리로, 내속리면 묘막리를 만수리로 명칭변경.
1989년-옥천군 안내면 오덕리 일부를 삼승면 원남리에 편입하고, 회북면 마동리·마구리·묘암리와 회남면 염티리를 청원군 문의면에 편입.
1945년 광복당시와 비교할 때 면적은 행정구역 조정으로 599.14㎢로 줄었고, 자연부락은 4백72개에서 4백60개로 줄었다. 행정리는 2백25개에서 2백43개로 늘어났다.
◆인구
보은의 인구는 94년말 현재 4만9천8백91명으로 해방직전인 1944년의 7만22명에 비해 29.7% 감소했다. 각 시기별로 살펴보면 1944-1949년까지 연 4.2%의 높은 증가율을 보이며 49년에 8만4천8백61명을 기록하는데, 이는 출생에 의한 자연증가라기 보다는 광복과 더불어 군인, 군속, 징용으로 나갔던 장정들과 해외동포가 귀환함에 따라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1949-1955년의 기록을 보면 6.25전쟁으로 인명피해가 많아 전국증가율 연 1.1%에 못미치는 1.0%으 ㅣ증가로 9만11명으로 늘어나는데 그친다.
이후 60년까지는 연 2.6%의 높은 자연증가율을 보이는데 특히 59년과 60년을 비교하면 9만4천7백15명에서 10만1천4백41명으로 무려 7.1%의 증가율을 기록한다. 이런 현상은 전쟁동안 헤어져 있었던 부부들의 재결합과 전쟁으로 연기해야만했던 젊은이들의 결혼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면 흔히 나타나는 베이비붐으로 출생률이 크게 늘고, 전쟁때 도입된 항생물질(페니실린 등) 및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62년 '가족계획'이 전국적으로 추진되면서 보은군도 인구증가율은 둔화되어 65년의 11만3천8백25명을 정점으로 94년말 현재까지 4만9천8백91명으로 43.8%의 커다란 감소를 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크게 인구가 줄어든 것은 인구정책에 의한 출생률의 감소와,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따라 이농현상 및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 도시로의 이주가 가속화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가구수 역시 66년의 1만8천2백42가구를 정점으로 93년말 현재 1만4천2백33가구로 줄었는데, 가구별인구수가 6.46명에서 3.50명으로 감소하고, 특히 30-39세의 연령층의 인구감소가 두드러져 청장년층의 도시이주를 여실히 드러낸다. 성별에 따른 인구구조를 보면 1954년에는 남자 4만5천56명에 여자 4만7천3백30명으로 여자 1백명당 남자 95.2명을 나타내는데 이는 6.25전쟁으로 다수의 남자들이 전사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1961년을 기점으로 여자의 수가 많아지기 시작해 94년말 현재 남자 2만5천2백26명에 여자 2만4천6백65명으로 여자 1백명당 남자 1백3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과 결혼할때 여자들이 농촌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여자 결혼 적령기라 하는 20-24세의 경우 여자 1백명당 남자 3백명이상의 비율을 나타내어 농촌총각 결혼문제등의 사회문제를 안고있다. 55세 이상에서 여자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 85세 이상에서는 3배이상 여자의 수가 많은데 이것은 여자들의 평균수명이 남자보다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