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숙희(보은 장신)
문장대 오르는 길
2003-07-19 보은신문
푸르름이 더해 가는 6월이 왔다. 푸르름 만큼이나 싱싱하고‘꿈’으로 가득 찬 여고시절을 떠올리면서 나는 가끔씩 학창시절의 희(熙)·노(怒)·애(哀)·락(樂)의 추억 속에 잠기곤 한다. 유별나게 단짝이었던 미경이를 만난 것은 얼마전이다. 학교 다닐 때 사소한 의견 차이로 다툰 일이 있은 후 각자 생활전선에서 가정을 꾸려나가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이런 미경이와 속리산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우연히 앨범을 펼쳐 친구들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미경이의 애띤 사진을 보고는 그래, 전화해야지! 하고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고, 우리 둘은 과거는 잊은 채 누가 먼저라기보다도 함께 속리산으로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점심을 먹고 다소 늦게 문장대 등반 길에 올랐다. 평소에 걷기 운동을 게을리한 탓인가? 등반을 하지 않다가 산에 오르려니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지만 숨이 차고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분만은 매우 상쾌하였다. 그 이유는 학교 다닐 때 미경이와 화해하지 못했던 숙제를 20여년이 지나서야 푸는 것 같아서이고, 또 하나는 내 고장의 자랑인 명산 속리산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산에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이 많았던 산행이라 더욱 그랬다.
한 발자국씩 산을 오를 때마다 초록 잎사귀가 곳곳에서 등산객을 반기는 듯한 숲, 풀들...
짙은 녹음이 싱그러운 한적한 오솔길...
산자락을 타고 내리는 초여름의 바람결에 내 고장의 명산 속리(俗離)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듯한 생동감...
천상의 소리인 듯 바위틈 사이로 솟아나 굽이쳐 흐르는 맑은 계곡의 물소리...
이 모든 것들이 현실세계의 복잡 한 생활의 틀에서 벗어나 가슴을 활짝 열고, 시(時)·공(空)을 초월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음이리라! 5대 사찰중의 하나인 법주사를 뒤로하고 문장대로 가까이 할수록 정상을 정복하고 하산하는 등산객을 마주칠 때마다 서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아마도 평상의 생활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인 것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이는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 때마다 인간은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참(진실 : 眞實)’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문장대를 절반쯤 남겨두고, 미경이와 나는 길가 숲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무리를 지어 발길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등산객 중에는 색깔이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먼 곳을 응시하면서 하산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흰색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시각 장애인 듯 싶었다.
‘아니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을 당당하게 내려오고 있을까?’ 생각하며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쪽을 응시하였다.
‘저 사람들 좀 봐’
‘아니 앞도 못 보는 사람들이 무슨 산행이야’
‘그러게 말이야’하고는 미경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여느 평범한 등산객처럼 조용히 산을 즐기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두발 앞부터 계단입니다’
‘오늘은 참 햇살이 눈부시네요’!
이 때 우리는 한사람의 시각 장애인을 안내하며 내려오는 자원봉사자들이 일일이 눈앞의 전개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장애인의 눈과 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앞 못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산행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리고 삶의 의지와 주위의 따뜻한 사랑만 있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하루였다.
오늘의 산행 때문에 장애는 불편할 따름이지 결코 장애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아직도 살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문장대 오르는 길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