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보는 세태풍속

김홍춘(편집국장)

1996-04-27     보은신문
바야흐로 계절은 선남선녀가 짝을 짓는 결혼의 계절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각 예식장주변은 북새통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식 결혼식이 있기전 우리의 전통 혼례식에는 말 그대로 마을의 축제와 같이 행해졌음을 우리는 보고 참여 해본 경험이 있다. 이웃들은 각자 가정의 형편대로 혼주집을 위하여 음식과 성의를 표하고 잔칫날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함께 참여하여 축하와 마을의 단합을 기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식이 서구화되면서 고유한 우리의 전통 혼례는 빛을 발하고 말았다. 이러한 서구식의 결혼의식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 의식을 신신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외국에서 온 것인 이상 그러한 결혼식을 올리고, 주례를 서고, 또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해도 유교적인 인습만을 고집하지 않고 서구 문물에 어느 정도 젖어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 소위 신식 결혼식을 맨 처음 올린 사람은 신랑 조만수와 신부 김륜시이다. 때는 1897년 4월18일이었다. 그 장소와 주례, 그리고 결혼식 절차나 하객들의 분위기 같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결혼식은 분명 장안의 큰 화제였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이들의 결혼식보다 18년이나 후에 있었던 최활란의 신식 결혼식 때에도 그 결혼식 자체를 사건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런 짐작은 가능한 것이다.

족두리에 연지곤지 찍고 신랑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채 시집을 가야했던 시절에 이채로운 드레스를 입고, 신랑과 팔짱을 낀 채 퇴장하는 그 결혼식은 분명 사건이었을 것이다. 최초 신식 결혼식의 선랑 조만수는 1876년 1월1일 과천 출생으로 17세 때 상경하여 이화학당장 조세핀 오펠이아 페인의 한국어 강사로 있다가 1899년 이화학당 회계 겸초대 서무주사를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초대 서무주사직을 맡기 2년전인 21세 때 이화학당 학생인 김륜시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1889년 4월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9년간 공부하고, 18세 되던 해인 1897년 결혼과 더불어 졸업을 하게 된 김륜시는 이화학당에서 교육받은 신세를 갚기 위하여 평동 91번지(지금의 적십자 병원 자리)위치한 시댁에서 학교를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학교란 이화지교(梨花支校)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화학당에서 관리하는 부속학교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때 김륜시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당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졸업이 따로 없이 결혼이 곧 졸업이라고 할 정도로 학교를 떠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김륜시 역시 9년간이나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십년도 더 넘게 이화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당시 방학이 되면 학생 단속 때문에 선생들은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집에 오면 부모들은 신랑감을 미리 대기시켜 놓았다가 결혼을 시켜 버리는 바람에 개학 때가 되면 학생은 오지 않고 결혼했다는 간단한 쪽지만 보내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놓고 하는 것은 인륜의 도리라고 한다. 이와같이 축복과 사랑으로 맺어진이 신성한 결혼이 몇년안에 헤어지는 경우가 10명중 3~4명이나 된다고 하니 삶의 방법과 세태의 변화가 잘못 흐르고 있지나 않나 싶다.


<데스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