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속 하개리 99칸 고택을 찾아서

꿈에 신령 계시받아 9년8개월간 지어 세밀한 고증·보수 통해 옛 고풍 찾아야

1990-02-17     보은신문
99칸을 갖춘 고택(古宅)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다. 또한 거대한 규모에 걸맞는 정신적 기틀을 가꾸어, 후학의 양성에 힘쓴 집은 매우 드물 것이다. 오늘날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기업확장의 일세로 나가는 경향을 봤을 때 보은 외속 하개리에 자리잡은 99칸의 집은 물질적인 팽창뿐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의 확장을 꾀한 구한말(舊韓末)의 대표적인 고택으로 여러면에서 자랑할 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보은읍에서 상주방면으로 행하는 버스에 올라 약 십오분 남짓 달리다 장안마을에서 내려 좌측으로 3백여 미터를 굽어 돌면 빙둘러쳐진 소나무숲 가운데 옛 영화의 기풍이 어린다. 고택의 왼편으로 난 서원계곡의 물살을 들으며 좁다란 소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선 99칸의 집안은 그 방대한 크기에 비해 우선 쓸쓸함이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모로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어온 내력을 드러내는 듯 여기저기 허물어진 담벼락과 군데군데 퇴색된 잡초만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6.25의 폭격과 80년 수해로 많은 손실을 가져온 99칸은 지난 84년 중요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된 선민혁(宣民赫)씨의 고택이다. 선(宣)씨의 시조는 선민혁씨의 22대조인 선윤지(宣允祉)로 당시 중국에서 한림학사로 지내다 고려말기에 귀화하였다고 전한다. 선씨의 본관(本貫)은 보성(寶城) 선(宣)씨로 일찍이 해상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하게 되었다 한다. 선민혁씨의 선조가 하개리에 집을 짓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충청도에 있는 섬에다(당시 전남 고흥에 삶) 집을 지으라는 신령님의 계시를 받고 충청도 일대를 찾아 헤매던 중 현재의 터가 수중도임을 발견함과 아울러 산세가 재상재(宰)자 모양으로 뻗쳐있는 명당임을 알고 99칸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화의 뒷배경에는 풍수지리설에 걸맞는 면모를 갖추고 있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자리잡은 집터뒤로 속리산 옥녀봉을 업고 동쪽에는 구병산이, 서남쪽에는 금적산이 포근히 감싼다.

또 하나 명당임을 대변해주는 것은 이 큰집에 하수구가 전혀 없다. 택지가 자갈밭으로 구성돼 아무리 많은 빗물이 쏟아진다 하더라도 10분을 넘기지 않고 찾아든다는 것이다. 이 고택은 1911년부터 9년 8개월에 걸친 대공사를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고택을 증축할 때 수백개의 유골이 나와 한때 고택 터는 풍장이나 애장터로 쓰였던 공동묘지였으리라 여겨지며 이곳에서 살던 사람가운데 허약한 사람은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고택이 목재는 장마철을 이용해 속리산 천왕봉 일대에 분포돼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뗏목을 이용해 옮겨왔고 일부는 사람의 목도로 경북지방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구한말(舊韓末) 감히 흉내내기도 힘든 규모로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 간살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때, 대지 4만평에 폭 1.2m, 높이 2.7m의 담장 길이만도 1.5㎞정도에 해당하는 변화기의 대표적 고택이다.

그 스케일과 대담성이 궁궐을 제외한 민간인의 사택치고는 가히 최고다. 대문 앞은 넓은 마당이 마련되고 바깥담 남쪽에 설정돼 있는 집의 어귀 솔밭숲 속에 이집 고조부 처흠(處欽)公의 효자정각(孝子旌閣)이 대문과 담장을 갖춘 다포(多包)집 형식의 건물로 서 있다. 이 고택의 특이한 점은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의 세공간으로 구분하여 안담을 둘러싸고 그 밖을 바깥담으로 두껍고 높게 둘러쳐 놓았다는 점이라고 전문가들은 평한다.

87년 복원돼 소나무향기가 진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아녀자들만이 내당으로 출입했던 사주문과 좌측으로 내담과 바깥담의 사이에 있었던 1백여평의 규모의 행랑채는 흔적조차 잃은 채 잡초만이 무성하다. 현 문터를 들어서면 예쁘장한 사랑채가 보인다. 당시 사회구조가 지극히 유교적인 부계사회였던 만큼 남성중심으로 구조물이 축조 돼 사랑채는 정남향으로 지어졌다.

사랑채는 H자형 평면으로써 가운데는 커다란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구들을 배치하였으며, 서쪽은 앞으로 서루(書樓)와 뒤의 구들, 동쪽은 앞으로 약방과 마루, 구들을 갖추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의 축과 직각으로 꺽어서 서향하여 배치했다. 평민은 역시 H자형이며 이를 U자형 행랑채가 둘러싸여 안마당 공간을 형성한다.

행랑채의 남쪽 끝에는 솟을대문을 덧달아서 안대문을 시설했는데 바깥대문에서 ㄹ자로 꺽어서 안채에 이르도록 계획되어 있다. 이것을 더욱 곡진하게 만들기 위해 대문앞에는 ㄴ자 담장을 둘러쳐서 대문앞을 가로막았다. 내담에서도 안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철저히 시선을 꺾어 구한말 당시 규방여인들이 행동에 얼마나 많은 제약을 받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당은 행랑채의 북쪽에 행랑채와 축을 맞추어 배치되었는데 3칸의 솟을삼문, 3칸의 사당채 및 이와 ㄱ자로 놓여진 제수(祭需)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고택의 특이한 점은 굴뚝이 뜨락보다도 낮게 설치되어 있으며 앞마당, 뒤안, 측면으로 불을 땔시 연기를 배출, 이중구조의 구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영화를 위한 사택보다 육영사업 차원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관선정(觀善亭)을 지어 기백명의 서생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국사를 토론하며 배움의 공간으로써 수많은 전국유명인사들을 배출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어느 한 과목을 통달해야만 이곳에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고 일단 입학이 확정되면 숙식은 물론 모든 경비일체를 선민혁씨의 선조께서 베풀어 주어 학문을 닦는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선씨가 기억을 더듬으며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름을 끄집어 낸 관선정 출신 인사들을 살펴보면, 우선 전국적으로 임창순(서울, 문화재 전문위원장), 변시연(호남), 고점량(제주), 이상빈(충남), 김사달(괴산) 등이고, 우리 고장 출신으로는 구연목(보은향교 전교), 김해동(강신), 구하서(산외 봉계), 김교문(종곡), 김낙정(지산), 김견구(종곡), 김학추(내속), 김경현(외속 구인), 박기종(장신), 어영하(외속 봉비), 이병한(삼산), 임창재(탄부), 정강석(외속 봉비), 홍진표(내북 두평)씨 등이다.

증조(永鴻公, 1895∼1925)때부터 시작된 관선정(觀善亭)의 육영사업은 1963년까지 지속되어 일제시대는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보은 사람이 아니면 감옥이 빈다”라는 항일의식의 맥을 찾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관선정의 건물은 6.25때 폭격으로 유실되고 집건물에 서당을 설치해 서생들의 배움의 공간으로 활용해 왔다 한다. 선씨가 가장 아끼고 공개조차 하기 꺼리는 가보는 조선조역사 5백여년동안 정승판서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서찰(書札)이다.

선씨가 공개를 꺼리는 이유는 지난 79년 사랑채에 고이 간직했던 홍선대원군의 12폭난초병품이 공개된 후 도난 당해 다시 그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라고 한다. 선씨의 선조중 선거이(宣居怡)公은 임진왜란 당시 우수사(右水使)였고, 선정훈(宣政薰)公은 보은지역 흉년이 들었을 때 군민에게 곡식을 베풀어 주는 등 후덕한 인품으로 현감 이상만 모시는 구 경찰서 앞에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행정당국에서는 민속자료의 보존책으로 솟을대문과 담장일부, 사주문 등을 복원시켜 놓았지만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연자방앗간을 비롯 과객실, 행랑채, 여기저기 쓰러진 담장 등 세밀한 고증과 보수를 통해 옛고풍을 살려야 함은 물론 개인 사택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국가의 문화재로서 보존책도 아울러 강구해야 할 것이다.